우리가 교회다 (강론)

새 것이 올 자리(2018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일)

바깥 주인장 2018. 11. 17. 23:58

2018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날

마르코 13, 24-32


66년, 유대독립전쟁이 일어났지만 4년 전쟁의 끝은 참혹했습니다. 그 즈음 작성된 복음 중 하나가 마르코,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듯 낡은 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것이 일어서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동포들에게 미움을 사던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이 패배는 하느님에 대한 불충의 대가이자 노쇠한 유대종교의 몰락으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크게 세부분으로 나뉜 복음은 단락마다 무너지고, 지나가고, 사라지는 ‘낡은 것’과 함께, 일어서고, 도래하고, 드러나는 ‘새 것’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시간배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연중의 마지막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다음 주이고 그러곤 바로 대림 첫 주입니다. 오늘 복음의 에피소드 역시도 수난이 시작되기 직전, 공생활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고난은 예수의 지상생활의 의미와 하느님이 누구인지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는 시간입니다. 희미하고 어릿하던 것이 맑고 명료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대림이 임박한 시기니 여기까지는 복음의 내용이나 시간상의 배열 모두 그럴만하다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전례력이 새롭게 시작되는 그리스도왕 대축일 한 주 전인 연중 33주일, 오늘이 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날”이어야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추운 겨울이니 가난한 사람들이 걱정되어선 아닐 것입니다. 그 보다 분명 심오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엔 이렇습니다. 근래 흔히 듣는 ‘복음화’의 뜻을 풀어보면 ‘복음적이지 않은 것을 복음적인 것으로 만들다(化)’겠습니다. 이 말은 가치 없던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거나 오염된 것을 깨끗하게, 희미하던 것을 또렷하게 만드는 ‘화’에 강조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웃어넘기기 힘든 부끄러운 현실도 엄연하지만 인류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교로 인해 달리 해석되거나 변화된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난’입니다. 가난은 유대인들에겐 질병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징벌이기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없어져야할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가난을 단순히 징벌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조건이자 세속의 포기로 다시 해석했습니다. 수도자들이 택하는 자발적 가난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이제 존경받을 일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버려진 것을 다시 찾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 ‘승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릇 진정한 영성은 가난한 이들의 얼굴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마련입니다. 예수가 그들 가까이 있었고 그들처럼 되었고, 마지막에는 목숨마저 빼앗긴 진짜 가난뱅이였기 때문입니다. 이 가난이 단순히 가난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살리기 위한 숭고한 자기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렴풋이 오늘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날’로 제정한 교황의 뜻이 짐작됩니다. 복음의 줄거리 상 오늘 복음 다음 이어지는 시간, 고난의 일주일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이 변두리로 내몰린 이들을 왜 먼저 보듬었고 가장 앞자리에 앉혔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 쓸모없는 이들을 업신여기던 유대종교라는 낡은 세계가 무너지고 이들을 가장 맨 윗자리에 앉게 하는 하느님 나라, ‘새 세상’의 도래를 암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찮은 것이 귀하게 대접받고, 변두리가 중심이 되고, 무력함이 곧 힘이 되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化) 세상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2015년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시작해 이듬해 연중33주일까지 이어진 자비의 해. 16년 가을 로마에 갔을 때였습니다. 공항고속도로변 입간판들엔 최고 브랜드 광고 대신 자비의 해를 알리는 광고가 게시되어있었습니다. ‘자비’, 생각해보면 고가 상품의 광고 자리를 차지할 만한 단어는 아닙니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고 입에도 올리지 않는, 기껏해야 책이나 강론대, 문학작품 속에서나 사용되는 저 말을 만천하가 다 볼, 저 높은 곳에 우뚝 올려둔 교황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우리의 교황은 우리 시대가 내다버린 것들을 다시 주워 먼지를 털고 광을 내어 다시 등잔 위에 올려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비, 사랑, 정의, 평등, 평화, 헌신, 희생, 이해, 그리고 가난. 이런 쓸모없어진 말들 말입니다. 가난을 자처할 수도 있는 ‘가치 있는 것’으로, 가난한 이들을 하느님으로, 세상의 고통을 하느님의 고통으로, 참혹한 현실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고자했던(化)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의 포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포부에 오늘 복음만큼 잘 어울리는 말씀은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자비의 해의 끝, 연중 33주일 오늘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날’로 정한 교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리고 외면한 자비와 같은 말들, 그런 가치들 모두를 다시 길어 올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우리답게 할 말들 말입니다.

 

낡은 것이 무너지고 새것을 세울 시간입니다. 세우되 기억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자리가 다름 아닌 낡은 것이 있던 자리라는 사실입니다. 겨울의 자리에 봄이 오고 어둠의 자리에 빛이 듭니다. 낡은 것을 밀어버린 자리 위가 새 것이 들어설 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자리는, 우리의 믿음이 세워질 자리는 오염되고 탁해진 세상과는 격리된 무균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한가운데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저 쓸모없고 버려진 말들을 우리의 말로 삼고 몸으로 용기 있게 증언하며 저 높이 올라 대담하게 선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