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도끼다(2018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일)
2018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일
요한 6, 60-69
태풍이 온다던 저녁, 본당에서는 영화제가 있었습니다. ‘내 친구 정일우’, 2012년 선종하신 예수회 정일우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장비가 변변치 않아 여간해서 영화에 집중하기 어려운데도 자리를 떠나는 분이 없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진짜 삶이기 때문이겠지요. 대학 강단을 떠나 도시 빈민들과 동고동락했던 한 사제의 이야기는 인생은 무엇을 했는가보다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가로 평가받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부님의 성공보다는 스스로 실패라고 회상했던, 도시빈민들을 위한 마지막 싸움인 상계동 이야기가 내내 가슴에 남았습니다. 신부님의 일대기를 다큐로 제작하기 위해 취재하는 과정에서 당시 주민들은 그때를 다시 회상하고 싶지 않아했습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거나 말하고 싶지 않다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그들의 속내가 궁금했습니다. 정일우 신부님은 단순히 철거민들과 함께한 것만이 아니라 ‘복음자리’처럼 집을 잃은 사람들과 새로운 정착지를 꾸리기도 했지만 상계동만은 예외였습니다.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나레이터는 이를 너무나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받은 때문이라 진단했습니다. 힘없는 이들에게 세상의 관심과 지원은 큰 힘이 되어 안정된 삶을 돌려줄 순 있어도 ‘새인간’, ‘새세상’을 꿈꿀 영감을 반드시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시 주민들은 아마도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까지만 신부님을 필요로 했을 뿐, 그 너머 그가 같이 만들어 보자고 제안하는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상까지는 동의하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함께였지만 추종하지는 않았던 것이고, 필요했지만 삶에 대한 비전과 꿈을 나누진 않은 것입니다. 하긴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고 모두 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지요. 사실 언뜻 그게 그거 같은 이 미세한 차이는 그러나 전혀 다른 두 개의 운명처럼 엄청난 차이인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함께 넘었지만 하나는 그 너머 다른 삶을 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 이전의 옛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후속 중 에필로그에 해당합니다. 스승의 말을 ‘거북하다’라고 말하는 제자들 또한 방금 전에 스승 덕분에 배불리 먹은 군중의 일부입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을 빵에는 환호했지만 예수가 말하는 그 빵 너머의 삶은 낯설고 불편해 거북스러웠던 것입니다. 5주 연속해 우리가 들었던 ‘생명의 빵’은 그저 배를 채울 빵이 아니라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임은 분명합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고 스승이 묻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라고 ‘제자’들이 반문합니다. 사람들은 떠났지만 ‘제자’들은 남습니다. 예수와 같은 시공간에 있었지만 더러는 떠났고 더러는 남았습니다. ‘군중’과 ‘제자’가 구분되는 순간입니다. 제자들의 탄생입니다. 군중은 허기를 채우는 빵에서 그쳤다면 제자들은 그 빵 너머로 내쳐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빵이지만 하나에게는 빵이었던 것이고 다른 하나에겐 꿈이고 새세상을 위한 비전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1독서 여호수아기의 이야기처럼 새 땅에 당도했지만 다시 ‘조상들이 섬기던 강 건너편의 신들(이집트의 신들과 바알)’을 돌아가려거나 또는 정착한 땅에 원래 있던 ‘아모리 족의 신들’에 눈을 돌리는 사람과, 참된 ‘주님’을 섬기는 이들이 구분되는 순간과 같습니다. 그것은 노예살이의 낡은 인간으로 돌아갈지, 해방된 새로운 인간으로 살아갈지를 가르는 희미하지만 동시에 굵고 분명한 경계인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보다 ‘성서’라는 옛 용어를 더 좋아합니다. 경전은 법규와 규정의 의미가 강한 반면 ‘서(書)’는 편지이자 책을 의미하기에 더 폭이 넓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비단 규정의 모음이 아니라 무수한 민족들과 개인들의 삶, 인류 역사이기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 법이나 규율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그리스도의 꿈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보낸 일종의 편지인 것입니다. 글은 단순한 소통의 기호 이상의 것으로, 인간의 애환과 격정, 꿈과 투쟁, 절망과 희망, 그 모두를 담은 삶의 응축입니다. 예수라는 편지 역시 그래서 거북합니다. 영혼 없는 공문서가 아니라 실제 삶이고 꿈이기 때문입니다. 낯설고, 그래서 두렵고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혹자의 말대로 책이 도끼라면 차라리 예수라는 도끼로 내 삶이 휘청거리길 바래봅니다. 그래야 안온한 삶이 무너질 것이고 그래야 그 자리에서 새사람이 일어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끼가 내 삶의 허리에 꽂히길 기도합니다. 그래야 떠나지 않고 남고, 그래야 군중이 아니라 제자가 되는 것이고, 내 삶에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타계한 황현산 선생의 글 일부를 옮겨봅니다.
-황현산, 사소한 부탁 중 ‘오리찜 먹는 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