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마다지윈'(2018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2018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요한 6, 51-58
선교사는 일 년에 적어도 한번 소속 선교회와 교황청에 활동을 보고해야했습니다. 보고서는 단순히 교회적 상황만이 아니라 선교지의 정치, 경제, 자연환경 등 다양한 영역의 일들도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아메리카 대륙처럼 ‘역사시대’가 비교적 뒤늦게 시작된 지역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유입된 후 수많은 동물 종들이 멸종했습니다. 원인은 모피 등 유럽인들에게 내다팔기 위해 인디언들이 무분별하게 사냥했기 때문이라 알려져 왔습니다. 돈의 위력이 그만큼 대단한 것 같지만 수수천년 돈 모르고 지내던 이들이 그리 짧은 기간에, 동물의 멸종을 가져올 정도로 물질에 대한 욕망이 극대화 되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는 않습니다.
북미를 선교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보고서는 그러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인디언들의 심성을 이해할 수 있는 북미신화를 먼저 소개합니다. 태초에 인간은 다른 동물과도 소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로 치면 창조주 격인 ‘위대한 정령’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대표, 다른 동료들과 달리 집채만 한 몸집의 문지기(keeper)들을 소집했답니다. 위대한 정령의 이야기인즉슨, 인간은 연약하니 먹고살 방도를 찾아주자는 것이었고 문지기들은 논의 끝에 인간에게 일정 양 밥이 되어주자고 결정했답니다. 쉽게 말해 사냥 당해주고 먹히자는 이야기였습니다. 실제로 인디언들은 필요한 만큼만 벌목하고 일정한 양만 사냥했답니다. 자기 살을 내어주어 동료를 살리는 이 눈물겨운 우정에 감사하듯 인디언들은 음식을 남기는 법이 없었고 국이라도 끓일 경우 한 방울이라도 떨어트릴세라 극도로 조심했습니다. 흡사 하나의 종교예식과 같았습니다. 한계치를 정한 벌목과 사냥으로 당연히 숲은 항상 우거지고 동물들도 풍성했겠지요. 인디언들은 이러한 자연세계와의 평화로운 관계를 ‘파마자지윈’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들어오곤 사정이 달라집니다. 홍역과 천연두 등 유럽인과 함께 들어온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의학적 상식이 없던 인디언들은 필시 동물들이 자신들을 저주한 때문이라고 여겼답니다. 사냥 당해준 동물들을 위해 제사와 감사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을 당하니 이젠 동물들과 오랜 시간 유지되던 ‘파마자지윈’이 깨진 것이라고, 전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돈벌이가 목적이 아닌 적군을 죽이는 학살, 무차별적인 사냥이 벌어진 이유입니다. 밥이 되어준 짐승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했을 식탁엔 이젠 분노와 파괴, 정복의 성취감만 가득했을 겁니다.
문명화란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현대문명을 잠식한 서구의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얼마나 황폐한 것인지 반성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생각할 것이 많은 이야기입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 감사와 증오, 전쟁과 평화를 가르니 말입니다. 변한 거라곤 관점 하나인데 말입니다. 인디언들이 빼앗긴 것은 단순히 땅이나 자연이 아니라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은 사실 세상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몇 주째 우리는 연속해서 ‘생명의 빵’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나누어준 예수의 살과 피, 신화 속의 ‘피마자지윈’의 세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전혀 종이 다른 동물들과도 소통하고 공생했던 세상처럼 사실 예수가 생을 걸쳐 펼쳐놓았던 식탁도 그랬습니다. 세리와 죄인, 과부와 고아, 병자와 버림받은 이들이 앉았던 식탁은 벽도 담도 피부색도 귀천도 성별도 빈부도, 그 모든 경계가 무색한, 누구라도 둘러앉아도 좋을 너른 식탁 말입니다. 아비규환의 전쟁터 같은 우리의 식탁, 우리의 세계와는 다른 세상입니다.
누군가의 밥이 되어준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감동적이다 못해 눈물겨운 이야기입니다. 인디언들이 허투루 버리는 살점 하나 없이 동료 동물들의 살을 먹던 식탁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거룩한 종교인 것입니다. 그런 자리라면 그 누가 마음대로 죽이고 함부로 배어내고 더 챙길 마음을 먹겠습니까. 그 누가 먹는다는 것을, 살아있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겠습니까. 모든 것은 대단한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 마음입니다. 결국 마음 한 조각이 세상 전체인 것입니다. 실로 ‘생명의 빵’인 것입니다.
성찬례는 무엇입니까. 빵과 포도주는 그대로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고백합니다. 더 귀한 먹을거리로 변하거나 피가 흐르는 살덩이로 변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실상 변화는 빵과 포도주의 변화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입니다. 이 식탁은 “너희도 이를 기억하여 행하라”라는 마지막 유언처럼 스승이 온 생을 통해 펼쳐 보인 식탁을 기억해내고 다시 차릴 용기를 얻는 자리인 것입니다. 스승의 마지막 다락방의 식사를, 오천 명을 거둬 먹인 언덕을, 주린 배로 횡단하던 갈릴래아를, 라자로의 무덤을, 자캐오를 부른 나무 아래를, 눈물로 바라보던 예루살렘 도성을, 십자가 오른 편의 죄수를, 홀로 남겨둘 어머니를, 마지막 숨을, 이 모두를 기억하고 불러 모아 식탁을 차릴 힘을 얻는 자리입니다. 마음, 스승의 눈빛을 입고 스승의 마음을 대신 품는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