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2018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2018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마르코 4, 26-34
4대강 사업이 비리로 얼룩진 졸속 국책사업이었단 것은 이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22조 이상의 혈세낭비, 로비와 담합, 재앙에 가까운 환경파괴, 토건세력만 배불린 가짜 경기부양. 그 패악을 나열하기조차 힘들지만 제가 주목했던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수변 마을들의 몰락입니다. 그 몰락이 그렇다고 가난해졌거나 주민이 떠난 유령마을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강바닥에서 긁어낸 골재를 야적하기 위해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농토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똑똑한 도시사람들, 더 정확히는 투기꾼들이 끼어들었고 성실한 땀의 정직한 결실로 살아왔던 농민들은 말 그대로 ‘졸부’가 되었습니다. 땅을 중심으로 오랜 세월 형성되어온 마을문화가 붕괴되었고 자연의 너그러움과 기다림의 미학을 알던 넉넉한 농심도 사라졌습니다. 사업을 위해 수용 당했던 것은 비단 땅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들은 마르코 복음의 공동체에게는 분명 생생한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우선은 거의 목축과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으니 분명 생명의 생장에 비유되는 하느님 나라의 뜻을 우리보다 더 실재적으로 느꼈을 겁니다.
농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씨앗을 심지만 그 씨앗에서 어떻게 뿌리가 내리고 몇 천 곱절이 되는 또 다른 물질이 생기는지 알 길 없지만, 때가 차면 수확한다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실로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르지만”, “땅이 저절로 열매 맺게”하는 이치 말입니다. 자연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던 고대인들에게 자연은 철따라 먹을 것을 주는 넉넉한 존재인 동시에 가뭄과 홍수, 천둥과 벼락같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 통제 밖의 ‘신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치를 따른다’는 뜻의 순리, ‘자연의 순리’처럼 그들은 때가 차면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열매에 비유되는 하느님 나라 또한 그들에게 그러니까 오면 좋고 안 오면 말고 식의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도래하는 ‘확신’의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사는 게 우리처럼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투성이니 부활을 떠올리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날로 험악해지는 동포들로 매일이 고단했을 것이고 ‘그날’까지 얼마나 기다려야할지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오늘의 비유는 그야말로 위로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도래한다는 이 하느님 나라는 갖은 고초를 겪고 돌연 보상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농부가 하늘과 자연, 시간에 기대어 땅을 성실히 일구는 것처럼 조금씩, 알아채기 힘들게 자라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막연히 확신 없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도래할 것이 하느님 나라란 확신과, 이 파종과 수확 사이의 고단한 삶이 그저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물을 대고 잡초를 뽑고 마음을 쓰는 농부의 ‘의미 있는’ 매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본질적으로 종말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종말은 언젠가 닥쳐오는 파국의 날이 아닙니다. 이 종말은 순례자의 여정의 목적지처럼 언젠가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이고, 농심의 확신처럼 오늘의 충실함으로 한 땀 한 땀 소리 없이 자라고 채워지고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이해는 우리들에게 두 가지의 새로움을 선사합니다. 하나는 충실히 매일을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그 현실에 붙들려 매몰되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두가 아니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가올 내일을 폐색이 짙다고 그대로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농부가 아무리 정성을 다했다고 똑같은 결실이 주어지란 법은 없고, 오롯이 하늘과 자연에 맡겨야하는 어찌할 도리 없는 나머지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말해 이 하느님 나라는 우리로 하여금 내일을 자만하게하지 않고 동시에 그렇다고 포기하게하지도 않는, 제몫을 다하고 나머지를 하느님의 자비로움에 내어맡기는 겸손을 가르칩니다.
모두 내일을 걱정하고 또 계획합니다. 계산기를 누르며 잔뜩 기대하거나, 앞이 깜깜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엔 하느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분명 우리 삶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부분이 존재하고 또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헤아릴 길 없는 섭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우리는 희망이라고도, 신비라고도 합니다. 어쩌면 이 ‘미지’의 나머지 분에서 우리는 오히려 불안한 매일을 견디고 전진할 힘을 얻는 것입니다. 어찌할 도리 없는 그 몫은 하느님 자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고단합니다. 이 고단함은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동시에 유혹 받게도 합니다. 수확이 언제인지 모르니 하루하루가 곤욕입니다. 또 당장에 얻을 수 있는 것들 앞에 옳고 그름 역시 흐릿해집니다. 그러나 수확기의 열매를 위해선 농부는 땀을 흘려야합니다. 적어도 씨앗을 품고 있는 땅을 떠나지 말아야합니다. 매일이 농부에겐 수확의 맛보기요 추수의 일부인 셈입니다. 하느님은 사실 우리를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닌 동역자로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농부의 하루하루가 추수의 열매로 돌아오듯, 믿는 이들의 매일의 삶은 이미 와있지만 아직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완성되어가는 하느님 나라의 벽돌인 셈입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 그분 역시 그랬습니다. 십자가라는 운명을 알았지만 주저했고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맡겼습니다. 곧 떠날 지상의 벗들이지만 죽기까지 사랑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먹히지 않고 부활이라는 생명의 내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에 속하지만 거기에 질식하지 않고, 내일을 고대하지만 막연히 기다리지 않고 밀고나간 스승은 그러니까 팽팽한 활시위에 서있던 삶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제와 내일, 파종과 수확, 봄과 가을, 시작과 끝, 땅과 하늘, 현실과 전망 사이 위에 놓인 것입니다. 그러나 떨어질라 걱정 마세요. 활시위는 아주 길고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