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집(2018년 5월 20일 성령강림대축일)
2018년 5월 20일 성령강림대축일
요한 20, 19-23
무릇 권력은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하여 저항세력들을 여러 수단들을 동원해 무력화 시켜왔습니다. 그 중에는 물리적 폭력 말고도 기억 자체를 지워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공식적인 역사에서 어떤 이름을 삭제하거나 입 밖으로 다시 꺼낼 수 없도록 금지하고, 아예 역사를 왜곡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형벌을 ‘기억의 몰수’라고 부릅니다. 권력의 입장에선 기억 자체가 위험이고 불온한 세력인 것입니다. 반면 추종자들과 지지자들에겐 기억 자체가 힘이고 무기인 셈입니다. 기억이 생생할수록 추종자들의 결속과 단결은 견고해집니다. 기억이 살아있다면 아무리 억압하고 입을 틀어막아도 언젠가는 되살아나는 법입니다. 기억은 힘이 셉니다. 뜨겁게 사랑한 상대는 사라져도 그 기억은 남기 마련입니다. 사랑했던 기억은 그를 언제든 마음속으로 불러오고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심지어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불꽃이나 혀의 모양으로 내려왔다는 성령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을 용기백배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도대체 무엇인가. 초자연적 에너지? 생각해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이 바로 이 성령입니다.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이 성령강림은 사실 그런 것을 기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태초에 세상과 인간을 빗어 만들 때처럼 숨을 불어넣고(요한 20, 22) 떠나는 스승의 행동은 이 순간이 일그러지고 상처 입은 첫 창조를 다시 바로잡는 두 번째 창조임을 암시하고 있지만 이 극적이고 엄청난 순간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 잘 이해되진 않습니다. 도대체 이 다락방의 제자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스승의 비참한 죽음은 제자들에겐 아무리 살아생전의 스승이 멋지고 감동적이었어도 지워버리고 싶은 추문이고 떨쳐버리고 싶은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두려워하던 권력, 유대교가 십자가 처형으로 기대했던 효과였을 것입니다. 정치범에게나 행해지던 십자가 극형은 사형수에 대한 기억 자체를 위험한 것으로 봉인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기억을 빼앗는 ‘기억의 몰수’형인 셈입니다. 제자들은 생전의 스승이 보여준 삶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어도 십자가 죽음 앞에 그만 몸을 움츠리게 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픈 기억은 지워버리고 싶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처참한 마지막 기억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던 제자들이 어떻게 용기 있게 닫힌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스승의 귀환입니다. 생전의 스승이 얼마나 아름다웠고 빛났든, 처참한 마지막의 기억에 꼼짝없이 붙들려있던 제자들은 부활해 돌아온 스승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이 부활이 생전의 시간이 헛되지 않음을, 그를 쫓던 제자 자신들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마지막 장면으로 봉인되었던 스승 생전의 찬란했던 모습들이 다시 되살아난 것입니다. 제자들 한 가운데 오시며 전해준 ‘평화’, 그것이 제국의 평화와 다른, 더 충만하고 견고하며 드높은 것임을 분명 실감했을 것입니다. 생전 스승의 말들이 돋아나는 새순처럼 새록새록 다시 기억되고 꿈틀거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따진다면 성령강림은 오순절,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부활 이후부터 승천까지, 아니 지금까지 이어지는 어떤 ‘점진적인 사건’인 셈입니다. 스승이 곧장 떠나지 않고 제자들 사이에 머물며 살아있을 때 모습을 재현했던 이유 역시 이것 때문입니다. 기억을 되살리기. 그 기억으로 다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스승은 제자들 사이에서 잠시 더 머문 것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보면 기억입니다. 교회의 시작이 오순절인 이유 역시 그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러니까 스승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이들의 모임, 기억하는 자들의 집입니다. 그가 누구였고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희생했는지를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들, 그것을 가슴에 새겨 넣은 이들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기억은 재현을 불러옵니다. 참된 기억은 ‘추종’이기 때문에 그처럼 살기를 마다치 않습니다. 스승처럼 사랑하고 아파하고 투신합니다. 버져진 것들에 마음 쓰고 작은 것들을 눈여겨보며 약하고 허물어진 것들을 보듬는 손길 속에 스승은 다시 살아납니다. 성령강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오늘 우리가 받을 은혜는 내게만 필요한 것이거나 말랑말랑한 것이거나 뜬구름 잡는 영험한 기운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그보다 절절하고 뜨겁고 구체적이고 매우 현실적인 은총인 것입니다.
이틀 전, 5.18 광주민주항쟁 38주기였습니다. 그날을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희생된 이들에 대한 단순한 애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쓰디쓴 기억을 다시 기념하는 이유는 그것이 권력자들이 빼앗아간 고귀한 정신을 다시 되찾아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공포로 봉인된 기억의 마디를 다시 풀고 두려움에도 차마 불의를 묵인하지 못해 길을 나섰던 고귀한 뜻들을 다시 되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야만 아픈 마지막 장면을 딛고 일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새날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는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기억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교회인 것입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기억의 집입니다. 동시에 기억의 전수자, 기억을 전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 기억은 말마디가 아닌 삶, 그것도 빛나고 뜨겁고 드높고 깊고 넓었던 삶입니다. 그처럼 사랑할 때 그는 생생해지고 마침내 살아납니다. 주님처럼 살아갈 때 주님은 언제든 우리 안에 되살아나고 함께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맞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 그분의 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