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벗고 그를 입다(2017년 9월 16일 성 김대건 안드레와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대축일)
2017년 9월 16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대축일
루카 9, 23-26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의 형제들입니다. 첫째 약현과 셋째 약종은 1801년 신유박해에 순교했고 둘째 약전과 약용 자신은 수차례 유배길을 올라야했지만 살아남았습니다. 이 형제를 삶과 죽음으로 갈라놓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성리학 위에 세워진 나라 조선. 그러나 이 통치철학은 어느새 낡고 구차한 관습과 형식으로, 나라를 생동하게 하는 원리로는 이미 노회해 버렸습니다. 왜란과 호란, 그리고 서세동점의 격동하는 세계를 감당하기에는 성리학은 너무 무겁고 둔했습니다. 새로운 모색이 들끓던 시대였습니다. 정씨 형제 모두 마침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학 서적을 접했고 이 새로운 가르침 안에서 쇄신의 불씨를 발견합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서학,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진 않았습니다. 여느 선비들처럼 정씨 형제들 역시 서학을 유학을 쇄신할 새로운 기운으로 생각했고, 또 실제로 정약용의 경우는 이를 발전시켜 유학의 하위체계인 실학으로 집대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글을 읽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는지는 각자의 몫이듯 형제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약용과 약전은 서적에 담긴 정신을 도구로 받아들이는데 그쳤다면 다른 두 형제는 그 안에서 예수라는 인격을 만났던 것입니다. 둘은 기존 세상을 고치고 바로잡아 보려는 마음이었지만, 다른 둘은 아예 또 다른 세상을 꿈꾼 것입니다. 앞의 둘은 지금의 세상과 어떻게든 버무려 살 수 있는 것이지만, 뒤의 둘은 지금 세상과 또 다른 세상 중 하나를 택해야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형제들을 유배와 순교, 생존과 절명, 삶과 죽음으로 갈라놓은 갈림길인 것입니다.
김대건과 정하상을 위시한 선배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의 ‘꿈’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꿈은 달콤한 것이기도 하지만 고되고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일 땐 더 그렇습니다.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나를 바란다면 뼈를 깎아내는 거듭남의 시간을 감내해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꿈이 내가 아닌 세상이라는 더 큰 차원의 꿈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지금의 세상과는 다른 꿈을 꾸는 것은 위험하고 도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성 사회에겐 그런 꿈은 그 자체로 위협인 것입니다. 체제전복, 불순세력, 이방인 그 무엇으로 불리던 그 꿈은 가혹한 대접을 받을만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내 습관, 내 사고, 내가 몸담았던 질서, 깃들어 살던 무리로부터 벗어나는 총체적 탈출을 의미합니다. 이 나를 벗는, ‘탈의’는 ‘다른 나’를 입기 위한 것입니다. 다름 아닌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옷’입니다. 반쯤 벗고 반쯤 걸칠 수는 없습니다. 새로 몇 군데만 기워 입을 수는 있지만 헌 부대에 새 천이 켕겨 터져나가듯 오래가지 못할 일입니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진정으로 사는 길은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고, 아예 마당을 새로 꾸리는 것입니다. 타협, 혼합, 양보 따위가 있을 수 없는, 입느냐 벗느냐 사이의 에누리 없는 선택인 것입니다. 이 선택에서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던 삶과 죽음의 구분은 무색해집니다. 아니 뒤바뀌는 것입니다. 살아남으려는 것이 죽는 것이고 죽을 각오로 다시 살고자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하고도 어려운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어제의 나, 지금의 세상, 더 구체적으로 그 안에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세상의 으름장과 생존의 공포마저 벗어버려야 하는 일입니다.
연일 북의 도발과 미.중.러를 비롯한 주변국의 들썩임으로 불안한 오늘입니다. 여러 해법들이 제시되지만 신통해보이진 않습니다. 모두다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얽힌 의견일 뿐 근원적 해결책은 아닙니다. 사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 아무리 좋은 흙을를 붓는다고 다시 균형이 돌아올 순 없습니다. 너도 나도 주장하는 대안들은 허투루 부어대는 토사에 불과합니다. 더 큰 공포가 다가오면 이내 흙탕물로 쓸려나갈 것들입니다.
우린 달라야합니다. 우리 신앙인의 해법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매진해야하는 것은 이 기울어진 마당을 버리고 다시 새판을 꾸리는 일입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엄혹한 국제정세에서, 이미 폭력과 힘으로 기울어진 이 세상이라는 운동장을 전술핵이나 핵무장 따위의 토사로 고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차피 힘 대 힘, 무력과 무력의 대결로 임시방편이고 다가오는 전운을 잠시 뒤로 미룰 뿐입니다. 파국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꿈을 꾸어야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천박하고 남루한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신앙인이 먼저 꾸어야할 꿈이고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짊어질 십자가며 살아야하는 순교입니다.
우리가 입어야할 새 옷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군사력 등 폭력에 대한 에누리 없는 거부, 힘에 대한 완전한 부정, 적자생존이 아닌 공존과 존중에 대한 믿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의의 마음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십자가, 무겁습니다. 누가 그것을 편하고 가볍다 말합니까. 가볍다면 십자가가 아닌 것이지요. 고되고 힘겹습니다. 십자가, 겁납니다. 다 저리들 가는데 나만 반대로 가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공포를 이겨내야 하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억합시다. 십자가보다 더 충만하고 깊고 완전한 기쁨은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대단한 것부터 생각지 맙시다. 매일 만나는 이웃 안에서, 이 허물 많고 탈 많은 못난 벗들 안에서 내가 짊어질 십자가를 발견하고 먼저 짊어집시다. 이 일상의 십자가가 곧 순교요, 이 매일의 순교가 연일 하늘로 치솟는 전쟁의 공포를 근원적으로 지워버리는 꿈인 것입니다. 느리지만 성실히, 더디지만 지치지 말고. 물들듯 익숙해져야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길들이고 길들여져 생명의 주인을 다시 모실 자리를 마련하는 인내가 필요한 일입니다. 죽은 나무 등걸에 새순이 돋듯. 그때 비로소 새 생명이 태어나고 새 마당이, 새집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꾸준히, 성실히, 정성스레 걸어갑시다. 약현도 약종도, 김대건도 정하상도, 그리고 수많은 무명의 선배들도 이 길을 그렇게 먼저 걸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