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배우다(2017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
2017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
마태오 18, 15-20
복음 안에는 사건만이 아니라 비유와 가르침이 많습니다. 생전의 예수가 목수였다는 것은 추정일 뿐 분명히 알 도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주 사용하는 농사에 빗댄 비유들을 보면 그의 직업이 농부가 아니었을까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농부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농경과 유목 문화 속에 살던 유대인들이 잘 알아들을만한 익숙한 상징들을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비유와 가르침을 읽으며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하는 것은 이야기 속 구체적 지침과 방법이 아니라 그 메시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유란 것은 애초에 더 잘 알아듣게 하기위해 사용된 도구라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말 하고자 하는 뜻, 메시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지은 공동체의 일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오늘날 그대로 적용했다간 큰일 날 일입니다. 대개 누군가의 충고를 달가워하지 않고 더욱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공개적으로 치부를 드러내는 방식은 자칫 소수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따돌리는 다수의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정작 우리가 복음을 통해 배워야하는 것은 이 처리 방법, 처세술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해야 했던 진의, 예수의 마음, 그의 인격인 것입니다. 복음에서 소개되고 있는 방법은 뉘우치지 않는 죄인을 단번에 내치지 않습니다. 집요할 정도로 계속해 다시 돌아오길 요청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유대 공동체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인 ‘공동체로부터의 배제’(이방인으로 취급)는 복음의 핵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화하고 설득하고 매달리는 끈질긴 인내가 핵심인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하찮은 한명이라도 밀려나거나 도태되거나 소외되지 않기를 바라는 예수의 마음이 읽혀지는 대목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시나이까”란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우리들의 하느님은 언제든 내쳐져도 좋은 허물 많고 나약한 인간을 참아주고 기다려왔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방식입니다.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가 맡기신 이들을 하나도 잃어버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아들의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하느님 인내의 마음과 함께 우리가 말하기 좋아하는 “우리”에 대하여 묵상하게 합니다. 공동체, 운명을 같이하는 무리란 뜻입니다. 서로 긴밀하고 끈끈한 무리이지만 간혹 그것은 개인에 대한, 또는 의견이 다른 소수에 대한 폭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죽기까지 인간을 인내하고 견디어준 예수의 자기희생과 용서가 없는, 십자가가 빠진 교회 공동체, 그것을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비슷한 생각과 생활수준, 사회적 지위끼리만 벗하고 지내는, ‘친목단체’일뿐입니다.
요 며칠 뉴스를 접하며 착잡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지난주에도 언급했던 장애인 특수학교로 불거진 서울 강서의 지역 갈등 때문입니다. 기어코 장애인 부모들이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읍소했습니다. 참담합니다. 강서 주민들에게 장애인 학교는 혐오시설이고 거주환경을 더럽히는 이물질입니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마련한 학교부지에 주민들은 특수학교가 아니라 국립한방병원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학부모들과 교육청은 둘 모두를 만족시킬 절충안을 찾자 십분 양보했지만 주민들은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한방병원은 지역주민의 환심을 사 표를 얻고자했던 야당 국회의원의 헛공약에서 시작되었지만 주민들에게 그것은 이미 지상최대의 목표가 되어있었습니다.
반세기 전 장애인과 히피, 유대인을 아예 사회로부터 제거하고자 고안되었던 가스실이 형태와 세기, 장소를 달리해 다시 출현한 것입니다. 수감자들을 실어 나르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행정체계와 가스실을 디자인하고 효율적인 주검 처리를 위한 사후 조치까지 계획했던, 배울 만큼 배웠고 충분히 선량한 시민이라 자부했을 나치의 부역자들 역시 자신들이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강서 주민들 역시 그럴 것입니다. 개중에는 남에게 해가 되지 않게 소박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주말이면 절과 성당, 교회에 가서 거룩한 표정으로 기도 올리는 이들도 분명 다수 일겁니다. 심지어 지역발전이라는 그럴듯한 대의에 자신도 힘을 보태고 있다는 자부심마저 느끼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천박하고 역겹지만 그 잘난 “우리”는 이렇게 새로운 가스실로 언제든 둔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자신도 함께 있는 것이라는 예수의 선언은 우리에게 이 “우리”가 어떤 우리여야 하는지 고민하게 합니다. 이 공동체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모아들이고 보듬고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공동체이지 내쫓고 낙인찍고 버리는 공동체가 아니란 뜻입니다. 소외가 아니라 동행, 배제가 아니라 포용, 단죄가 아니라 견딤, 죽음이 아니라 삶을 위한 방주입니다.
이 “우리”는 또한 위력적입니다. 소수의 목소리를 빼앗을 수 있고 나와 다른 이를 울타리 밖으로 가차 없이 밀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도 묶일” 만큼 못 이룰게 없는 엄청난 힘이기도 합니다. 생명과 치유를 위한 발휘될 힘이기도 합니다. 다시 또 우리는 죽음과 삶의 길목 앞에 선 것입니다.
결국 사드가 추가배치 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다치고 연행되었습니다. 강력응징과 대화라는 두 개의 카드를 동시에 사용한다는 정부의 주장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국제적 고립을 외치며 대화를 바란다는 것은 무기를 손에 들고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형용모순일 뿐입니다. 엄혹한 국제사회에서 이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 믿는 이들은 무력을 지지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에게 배운 이 “우리”라는 구원의 방주는 울타리 안으로 오그라드는 편협이 아니라 더 넓고 평평한 마당을 닮은 방주이기 때문입니다. 남한이 아니라 민족, 민족이 아니라 인류라는 더 큰 우리를 꿈꾸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우리는 스승에게서 처세가 아니라 그 인격을 배운 이들이기 때문입니다.